
몽골로 간 아이들: 북한 전쟁고아들의 흔적을 찾아서
몽골 초원으로 보내진 북한 전쟁고아 197명, 그 흔적을 지키는 75세 토야 할머니를 만나다
울란바토르 남쪽 자이승 승전기념탑에 오르면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풍경 대부분은 공사장이다. 크레인이 하늘을 가르고, 유리로 덮인 고층 아파트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간다. 몽골의 수도는 지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다.
자이승 승전기념탑에서 내려다보면 신축 고층 아파트 한 가운데 오래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두꺼운 석조 외벽, 낮게 깔린 2층짜리 러시아풍 건물이다. 번쩍이는 신축 건물 사이에서 이 건물은 마치 다른 시간대에서 잘못 걸어 들어온 손님처럼 보인다. 이곳은 74년 전 이곳을 찾아온 197명의 북한 전쟁 고아들이 살았던 터전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나 놀랍게도 올해 75세인 토야 할머니를 만났다. '토야'는 몽골어로 빛줄기를 뜻한다. 그녀는 이 건물의 주인이자 관리인이다. 이웃 부지가 차례로 팔려 나가고, 개발업자들이 "여기에 빌딩을 올리면 얼마를 벌 수 있는지" 계산서를 들고 찾아와도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현재 이 건물의 일부는 지역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은 처음부터 아이들을 위해 지어졌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채워졌던 공간입니다. 주변이 어떻게 변하든 이 역사의 뼈대만큼은 함부로 헐릴 수 없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아이들'은 지금 이 건물에 다니는 유치원생만이 아니다. 70여 년 전, 한반도에서 전쟁을 피해 이곳까지 온 북한 아이들이다.
1952년, 2,000km 밖에서 온 아이들
이 건물의 이야기는 2차세계대전 직후에서 시작한다. 토야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이 건물은 전쟁이 끝난 뒤 몽골에 억류되었던 일본인들의 노동력과 소련의 자본으로 지어졌다. 공산당 간부들의 휴양 시설로 지어졌던 곳이다. 그러다 1952년, 건물의 운명이 바뀐다. 한반도는 전쟁 3년째였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거리에 넘쳐나자, 북한 정부는 이 아이들을 '형제 사회주의 국가'들에 맡기기로 한다. 중국,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동독으로 수만 명의 아이들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행렬의 한 갈래가 몽골 초원으로 향했다.
몽골에 도착한 아이는 197명. 이 석조 건물이 그들의 새 집이 되었다. 두 개의 건물 중 왼쪽 건물은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들이, 다른 쪽 건물에는 아이들이 모여 살았다. 말도 통하지 않고, 겨울이면 영하 30도 아래로 떨어지는 낯선 땅이었다. 몽골 기록에 따르면 첫 겨울을 나는 동안 아이 6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토야 할머니는 기록에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뒷산 자락으로 놀러 나갔던 아이들이 뱀에 물려 숨졌어요. 저기 보이는 언덕에서요. 아이들을 거기에 묻어줬지요. 얼마 전까지도 거기에 무덤이 있었어요. 이제는 재개발로 모두 없어졌지만..."
그래도 몽골 사람들은 이 아이들을 정성껏 길렀다. 먹이고, 가르치고, 아플 때 치료했다.
김일성의 방문, 그리고 카메라
1956년 7월, 김일성이 울란바토르를 찾았다. 그는 이 고아원에도 들렀다. 당시 몽골에서 제작된 기록 영화 <이웃나라 귀빈>에는 아이들이 몽골 전통 춤을 추며 '귀빈' 김일성을 맞이하는 장면이 남아 있다. 화면 속 아이들은 웃고 있다. 하지만 그 장면은 동시에 무대이기도 했다. 두 사회주의 국가의 '혈맹'을 보여주는 선전의 한 장면. 카메라가 꺼진 뒤 아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그리움과 낯섦은 필름 어디에도 담기지 않았다.
1959년 5월, 갑작스런 귀국 명령
7년이 흘렀다. 아이들은 몽골어를 하고, 몽골 음식을 먹고, 몽골 노래를 불렀다. 몽골 교사들에게 아이들은 이제 자기 자식 같았다. 1959년 5월, 평양에서 소환 명령이 내려왔다. 비슷한 시기 북한은 동유럽 각국에 보냈던 고아들과 유학생들도 일제히 불러들였다. 체제 단속의 일환이었다. 몽골 교사들은 울며 붙잡았지만 아이들은 북한행 열차에 올랐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북한으로 돌아갔지만, 10명 정도 아이들은 몽골에 남아 입양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그 뒤로 몽골과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 사이의 연락은 거의 끊겼다. 다만 흥미로운 후일담이 있다. 돌아간 아이들 가운데 몇 몇은 훗날 어른이 되어 대사관 간부로 혹은 유학생으로 다시 몽골 땅을 밟았다. 어린 시절을 보낸 초원이 그들을 다시 불러들인 셈이다.
현지에서는 이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 몽골에 뿌리를 내려 몽골과학기술대학교(ШУТИС·MUST)에서 교수로 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름은 토무르바타르. 몽골식 이름을 가진 그는 한국전쟁의 상처가 한반도 밖, 유라시아 초원 한가운데까지 닿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내 이름은 김조선으로 정했습니다. 조선 출신이니까요"
몽골에 남겨진 고아들 중 한 명인 김조선 씨(당시 63세, 몽골명 삼당 채랭한드)는 2011년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김(金)이라는 성과 북한 평양 출신이라는 것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몽골에 전쟁 고아로 왔을 당시는 4살이었다. 대부분이 7년후 북한으로 돌아갔고, 그녀는 1956년 몽골로 입양되었지만 식모처럼 지냈다고 한다. 학교도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중단했으며, 그 후 고달픈 삶을 살았다. 그녀는 북한 출신 전쟁 고아들이 아직도 몽골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한국 사람들의 도움으로 59년만에 한반도 모국의 땅을 밟았다. 고국 땅을 밟은 그녀는 아직도 전쟁 고아를 잊지 않는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체제가 바뀌어도 끊기지 않은 끈
1990년, 몽골은 피를 흘리지 않고 사회주의를 내려놓았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택했고, 같은 해 한국과 수교했다. 북한과의 관계는 곧바로 얼어붙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몽골 국빈 방문 무렵, 두 나라는 상대국 수도의 대사관을 잇따라 닫았다. 하지만 몽골은 문을 아주 닫지는 않았다. 2004년 평양 대사관을 다시 열었고, 이후 남과 북 모두와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로 자리 잡았다.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이 몽골 땅에서 마주 앉은 일도 있다.
그 사이 이 석조 건물도 여러 번 옷을 갈아입었다. 한동안 비어 있었고, 어린이 병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부터 다시 유치원이 되었다. 70년 전 북한 아이들이 뛰어놀던 복도를 지금은 몽골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이 건물이 전쟁 고아들을 위한 쉼터로 사용된 이래, 줄곧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지금까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옛 고아원이 한반도에 건네는 질문
토야 할머니가 지키려는 것은 오래된 벽돌만이 아니다. 냉전이 아이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그리고 한 사회가 낯선 아이들을 어떻게 품었는지에 대한 기억이다. 몽골은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진영에서 출발했다. 전쟁 고아를 길렀고, 군대를 보냈고, 혈맹을 맹세했다. 그러다 스스로 길을 바꿨다. 총성 없이 체제를 전환했고, 그러면서도 옛 동맹과의 대화 창구는 닫지 않았다.
이 경험이 북한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나라가 걸어온 조건은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몽골은 북한이 '위협'으로 느끼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다. 북한이 언젠가 고립에서 걸어 나올 때, 그 길을 먼저 걸어본 이웃의 경험은 귀한 참고서가 될 수 있다.
해 질 무렵, 유치원 아이들이 부모 손을 잡고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하얀 석조 벽 위로 마지막 햇빛이 비친다. 70년 전 이 벽 안에서 울고 웃던 197명의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토야 할머니는 오늘도 이 건물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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