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골로 간 아이들 (2): 21살 몽골 선생님과 197명의 아이들
1952년 가을, 같은 계절 울란바토르에 도착한 시골 처녀와 북한 전쟁 고아들… 7년의 동거가 남긴 이야기
1952년 가을, 시골 처녀와 낯선 아이들의 만남
1952년 가을, 울란바토르에 두 무리의 낯선 이들이 도착했다. 한 사람은 열여덟 살 시골 처녀였다. 몽골 동북부 헨티 아이막 다달 솜, 발지 강이 굽이 도는 마을에서 온 부랴트 출신 소녀다. 이름은 다리마의 체렌둘람. 손에 든 것은 7학년 졸업증 한 장 뿐이었다. 딸이 그만큼 배웠으면 됐다는 어머니 때문에 2년을 집안일을 거들며 보낸 참이었다. 그녀는 고향 대학생을 따라 수도로 올라와 사범 학교 입학 시험을 쳤다. 꿈은 하나,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같은 해 9월, 또 다른 무리가 이 도시에 들어왔다. 한반도에서 중국과 소련을 거쳐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온 아이들이었다. 부모를 전쟁에 잃은 북한 아이들 약 200명. 몽골 기록 보관소 자료를 분석한 연구는 그 수를 197명으로 적고 있다.
아이들이 몽골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전쟁 중 북한 정부는 부모 잃은 아이들을 '형제 사회주의 국가'에 맡겨 키우고 교육한 뒤 다시 데려오는 정책을 폈다. 중국과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동독으로 수만 명의 아이들이 흩어졌다. 몽골은 그 가운데 가장 먼 초원의 나라였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적은 수였지만, 몽골에 온 아이들은 유독 어렸다. 대부분 3살에서 7살, 아직 엄마 품을 찾을 나이였다. 그 가을, 시골 처녀와 아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둘이 만나기까지는 2년 반이 더 걸린다.
상처투성이 아이들, 도시에서 가장 좋은 집
아이들의 첫 모습은 처참했다. 훗날 체렌둘람이 아들에게 들려준 바에 따르면, 아이들은 기운이 없고 몸 곳곳에 상처가 나 있었으며 바짝 말라 있었다. 몽골은 넉넉한 나라가 아니었다. 경제는 아직 일어서지 못했고 사람들의 살림도 빠듯했다. 그래도 몽골 정부는 아이들에게 도시에서 가장 좋은 집을 내줬다. 자이승 언덕 기슭, 정부의 특별한 용도로 지어져 당시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깔끔하고 아늑하다던 건물 두 동을 비우고 아이들을 들였다. 1편에서 토야 할머니가 지키고 있던 바로 그 석조 건물이다. 첫 겨울은 혹독했다. 울란바토르의 겨울은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간다. 몽골 기록에 따르면 그 첫 겨울에 아이 여섯 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남은 아이들은 버텨냈다.
4월, "선생님"이 되다
체렌둘람은 사범 학교에서 손꼽히는 우등생이었다. 1955년 4월, 몽골 계몽부(교육부)가 그녀의 첫 발령지를 정했다. 조선 고아 학교. 스물 한 살의 새내기 교사가 처음 맡은 반의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녀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더 이상 그 상처투성이 아이들이 아니었다. 아들의 말을 빌리면 "튼튼한 아이들"이 되어 있었다. 2년 반 동안 몽골 사람들이 먹이고, 씻기고, 돌본 결과였다. 처음에는 유치원 뿐이었던 시설에는 어느새 학교가 생겨 있었다. 교사, 보육 교사, 의사, 조리와 관리 인력까지 30명 남짓한 몽골인들이 이 아이들 곁을 지켰다.
몽골은 아이들을 그저 먹이고 재우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건강을 살피는 일과 함께 글을 깨우치고 기초 교육을 받게 하는 데 공을 들였다. 다만 그 교육은 순수한 돌봄만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언젠가 조국으로 돌아가 '사회주의 건설의 일꾼'이 되어야 할 존재였고, 교실에는 그런 이념적 목적도 함께 놓여 있었다.
같은 해 몽골은 울란바토르 근교 샤르가 모리트에 여름 캠프를 지었다. 여름이 오면 아이들은 도시를 떠나 초원으로 나갔다. 전쟁터에서 온 아이들이 몽골의 여름 풀밭을 뛰어다녔다.
"손 하얀 아이로만 키우지는 마시오"
1956년 7월,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울란바토르에 왔다. 그는 이 아이들을 직접 찾았다.
체렌둘람의 기억 속 김일성은 몽골 인민에게 감사를 표했다. 몽골 사람들 덕에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보니 기쁘다고 했다. 그리고 부탁인지 당부인지 모를 한마디를 남겼다.
"손 하얀 사람으로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몽골어로 '하얀 손(цагаан гартан)'은 궂은 일을 해 보지 않은 사람, 일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아이들을 귀하게만 키우지 말라는 말이었다. 지도자의 눈에 이 아이들은 고아이기 이전에 장차 돌아와 일할 '조국의 일꾼'이었다. 그 당부는 3년 뒤 현실이 된다.
1959년 5월, 첫 직장이 끝나던 날
1959년 5월, 평양이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몽골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북한은 동유럽 각국에 보냈던 전쟁 고아와 유학생들도 일제히 불러들였다.
왜 그랬을까. 연구자들은 1950년대 중반 사회주의 진영을 뒤흔든 사건들에 주목한다. 1956년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해외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다른 공기'를 마시는 것을 북한 지도부가 경계했다는 해석이다. 몽골 기록 보관소 자료를 분석한 연구도 이 소환을 체제 통제를 강화하려는 조치로 본다. 물론 이는 연구자의 해석이다. 전후 복구에 필요한 인력, 각국과의 외교 관계 같은 다른 요인이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아이들은 몽골에서 8년 가까이 살았다. 세 살에 왔던 아이는 열 살이 되어 있었다. 몽골어로 말하고, 몽골의 겨울과 여름을 알고, 몽골 선생님의 얼굴을 기억하는 아이들이었다. 체렌둘람은 아이들이 떠나는 그 달 말까지 그 학교에 남았다. 그녀가 교사로서 처음 일한 곳이었고, 그렇게 그녀의 첫 직장은 아이들과 함께 끝났다.
그 후, 한 선생님의 60년
아이들이 떠난 뒤 체렌둘람은 국립 사범 대학의 사서로 일하며 공부를 계속했다. 1967년 교육학과를 졸업했고, 울란바토르 28번 학교에서 1991년까지 22년 동안 쉬지 않고 교무 주임을 지냈다. 그녀가 만든 교실 운영 방식은 몽골 전역의 학교로 퍼져 나갔다.
그녀의 남편은 몽골 1세대 지식인으로 꼽히는 교육학자이자 역사가 Ш. 마암후였다. 그는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걷지 못하게 되었다. 체렌둘람은 45년 동안 휠체어에 앉은 남편의 손과 발이 되었다. 누워서 원고를 쓰는 남편 대신 그 원고를 잡지사와 연구소로 날랐다.
그녀의 인터뷰 기사에는 평양의 김일성 생가 기념관에서 찍은 사진도 한 장 실려 있다. 언제, 어떤 계기로 그곳을 찾았는지는 기사에 나오지 않는다. 혹시 그곳에서 옛 제자를 만났을까. 아직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이다.
2025년 가을, 피아니스트가 된 막내아들이 몽골 신문 인터뷰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체렌둘람은 아흔을 넘긴 나이였지만 정신은 맑았다고 한다.
기억하는 사람들, 사라진 아이들
체렌둘람만이 아니다. 이 일을 다룬 몽골의 옛 인터넷 기사 아래에는 지금도 이런 댓글이 달린다. "우리 어머니가 그 조선 아이들의 보육 교사였다." "우리 삼촌이 그 학교 교장이었다." "그 아이들 밥을 짓던 분이 여기 계시다." 몽골에서는 아이들을 키운 사람들의 기억이 이렇게 가족사의 일부로 이어지고 있다.
몽골에 남아 뿌리를 내린 조선 아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2017년 한 몽골 언론은 체르마라는 여성을 소개했다. 몽골에 남아 가정을 꾸린 한 조선인이 자신과 다른 아이들을 키워 준 사람으로 회고한 인물이다. 기사에 실린 사진에는 “30년 뒤, 키운 아이들과 함께”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다만 이 이야기의 시간표는 1952년의 아이들과 맞지 않는다. 기사는 아이들이 1959년에 왔다고 쓰고 있다. 몽골이 1960~70년대에도 400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받아 키웠다는 기록이 있으니, 체르마의 아이들은 또 다른 시기에 초원으로 온 아이들일지 모른다. 몽골과 한반도 아이들의 인연은 1959년 5월에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52년에 왔던 아이들 쪽의 기억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연구에 따르면 1959년 귀국 이후 몽골 정부와 아이들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는 거의 없었다. 몇 몇은 훗날 주몽골 북한대사관 직원이나 몽골국립대 유학생으로 몽골 땅을 다시 밟았다. 나머지 190여 명의 이름과 삶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살아 있다면 그들은 이제 일흔 후반에서 여든 초반의 노인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지금도 평양 어딘가에서 몽골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른다. 자이승 언덕의 붉은 집과, 샤르가 모리트의 여름 풀밭을. 70년 전 국경을 넘어 아이들을 품었던 사람들은 아직 이곳에 있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그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참고문헌
Sarangerel, N. (2025, October 17). Ээж минь төрүүлсэн хүүхдүүд, түшсэн ханийнхаа төлөө амьдралаа зориулсан [My mother devoted her life to the children she bore and the husband she supported]. Sonin.mn (Originally published in Зууны мэдээ). https://www.sonin.mn/newsDetail/13209
오미영. (2019). 오미영. (2019). 한국전쟁 시기 북한 전쟁고아와 몽골: 몽골 문서보관소의 자료를 중심으로 [War orphans of North Korea and Mongolia during the Korean War: Focusing on documents in Mongolia archives]. 북한연구학회보, 269-297.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51518
Archives for Cinema, Photography and Sound Recording, Mongolia. (Late 1950s). A view of the central part of Ulaanbaatar from Zaisan hill [Photograph, glass plate negative; digital copy, EAP264/1/12/3/98]. British Library Endangered Archives Programme. https://eap.bl.uk/item/EAP264-1-12-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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