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빚을 북한으로: 14세 시골 소년, 선교의 리더가 되기까지

은혜의 빚을 북한으로: 14세 시골 소년, 선교의 리더가 되기까지

·조회 14·

북한을 위한 개더링에 켜진 생일 촛불

지난 2026년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사흘간, 몽골 YWAM 다르항(Darkhan) 베이스에서는 북한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며 준비하는 특별한 집회, 'NK Gathering'이 개최되었다. 숙소가 넉넉지 않아 전국에서 30여 명의 핵심 리더만 초대받았다. 참석자들은 해외에서 온 북한 현장 사역자와 전문가들의 강의를 들으며 북한 선교를 성경과 역사, 문화와 전략의 눈으로 다시 바라봤다.

마침 집회 기간은 베이스를 이끄는 리더 태브나의 생일과 겹쳤다. DTS 학생들과 스태프들은 한마음으로 그의 생일을 축하하며 그가 걸어온 길을 축복했다. 선교를 향한 기도와 한 사람을 향한 축하가 한 공간에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그런데 태브나는 어떻게 열방을 품은 선교 리더가 되었을까. 이야기는 29년 전, 작은 마을의 양로원에서 시작된다.

1997년, 양로원에 찾아온 낯선 손님들

1997년, 태브나는 14살이었다. 그가 살던 작은 마을에는 몽골에서 가장 큰 양로원이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어느 날 울란바토르 반석교회의 어느 선교사가 이 양로원에 비전을 품고 찾아왔다. 양로원 원장이던 태브나의 아버지는 예수를 알지 못했지만 선뜻 방을 내주었다. "좋은 사람들 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왔다. 요셉이라고 불리는 그 선교사는 혼자 오지 않았다. 반석교회의 또래 청년들이 함께 와서 찬양을 인도하고 마을 아이들과 어울렸다. 그 친절함이 좋았던 소년은 교회 가는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17살에 울란바토르로 올라간 그는 반석교회에 다니며 사역을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묻던 시기였다.

기도실에서 지새운 밤

그 무렵 마음속에 꿈 하나가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순종하지 못한 채 2년을 흘려보냈다. 교회에 오면 기쁨이 넘쳤다. 대학에 가면 기쁨이 사라졌다. "내가 원하지 않는 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그를 괴롭혔다. 결국 그는 홀로 기도실에 들어가 밤을 새웠다. 그날 밤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말씀은 사도행전 16장 31절이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는 가족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만, 정작 가족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순종하기로 결단하자 변화가 시작됐다. 누나가 교회에 나왔고, 형이 뒤따랐고, 동생도 교회를 나왔다. 지금은 온 가족이 예수를 믿는다. 동생은 15년째 그와 함께 사역하고 있다.

무너진 건물에서 시작한 다르항 개척

19살이 되던 해, 그는 YWAM 사역에 헌신했다. 2003년 초 울란바토르 YWAM이 공항 너머의 건물로 이전하려고 했다. 이제 갓 들어온 청년이 할 일은 건물을 수리하고 고치고 짐을 나르는 것이었다. 같은 해 1월, 북쪽 도시 다르항에 새로운 베이스가 개척되었다. 이삿짐을 돕느라 처음 다르항을 밟은 태브나의 마음에는 묘한 끌림이 남았다. 한 달 뒤 그는 하나님이 다르항으로 부르신다고 확신했다.

2003년 5월, 그는 다르항 베이스의 개척 멤버가 되었다. 몇 명 되지 않은 개척 멤버들이 선교사의 차 안에서 함께 기도하며 시작한 일이었다. 베이스와 함께 교회를 개척했고, 킹스키즈(King's Kids) 유치원도 세웠다. 사들인 건물은 80%를 허물고 다시 지었다. 그해 9월 그는 울란바토르로 돌아가 DTS와 중보기도학교를 마쳤다. 당시 DTS 학교장이던 선교사에게 1년 반 동안 말씀을 배우고, 다시 다르항으로 돌아왔다.

일요일 오후의 국경 전도

초창기 다르항에는 일손이 늘 모자랐다. 주일 오전에는 다르항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오후가 되면 두 팀으로 나뉘어 전도를 떠났다. 태브나는 몽골 형제 간사와 함께 러시아 국경 마을 알탄볼락으로 향했다. 승합차를 타기도 하고 택시를 타기도 했다. 당시에는 "사람은 없고 사역은 많았다"고 그는 회상한다.

첫 사역은 뜻밖에도 가정 사역이었다. 교회 지도자 중에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함께 사는 이들이 많았다. 다르항 베이스는 그들을 위해 가정집회를 열고 결혼식을 치러 주고 주례도 섰다. 그렇게 가정을 세운 부부들 가운데 함께 사역에 헌신하는 이들이 여럿 나왔다.

마이크를 내려놓자 들려온 목소리

처음 한두 해는 즐거웠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돕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질문이 생겼다. "젊은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더 배우고 공부하고 싶은데." 그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찬양 인도자였다. 솔직히 그 자리는 인정받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마저 내려놓으라고 하셨다. 마이크를 놓으면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어느 날 교회 가는 길에 오래전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어린 태브나는 친구들에게 집안일을 시키곤 했다. 정작 자신은 친구 집 일을 거들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그를 좋아하고 그의 말을 따랐다. 어머니는 웃으며 "너는 정말 대장 기질이 있다"고 했다. 그 기억과 함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왔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리더로 세움을 받았다. 이제부터 리더가 되어라."

미국행 대신 '예스'

2010년, 미국에서 돌아온 박 선교사는 이제부터 태브나가 베이스 리더를 맡아 달라고 했다. 그는 한 달간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결혼한 지 한 달 남짓 된 때였다. 그에게는 미국 유학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첫아이를 미국에서 낳고 싶었고, 미국에서도 그가 오기를 바랐다. 기도 중에 그는 하나님의 분명한 대답을 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길이다. 내가 인정하는 길은 따로 있다." 그는 '예스'라고 답했다. 그해 12월, 그는 다르항 베이스의 첫 몽골인 리더가 되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그가 말하는 이유는 사람이다. 아버지 없이 자란 젊은이들이 제자가 되고, 훈련받고, 다른 나라로 나가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요즘 마음은 어때?" 아무도 묻지 않던 질문

리더가 된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간사 시절의 외로움이었다. 일은 늘 많았다. 그러나 "요즘 어떻게 지내니, 마음은 어떠니, 부모님은 건강하시니" 하고 묻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선교사들은 대부분 일을 정말 잘해요. 그런데 사람을 키우는 관계, 멘토링은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그는 그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그 답을 찾으려 리더십 책을 파고들었고, 존 맥스웰 리더십 훈련도 3~4년간 받았다. 그래서 그의 사역의 원동력은 일대일 양육이다. 지방에 갈 일이 생기면 남자 간사들을 차에 태운다. 오가는 길에 사역 이야기, 동료 관계, 재정 형편까지 나눈다. "저는 돈이 없잖아요. 그러니 하나님께 이 간사를 도울 사람을 연결해 달라고 같이 기도하는 거죠."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가르친 예수의 방식을 따라 하는 셈이다.

2만 가정의 문을 두드리다

그는 베이스가 '영적이기만 한' 곳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되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전한다는 원칙이다. 교회 개척, 복음 전도, 성경 보급, 북한 사역, 상담 사역까지 모든 사역의 목적지는 선교다. 그는 결과를 꼼꼼히 확인한다. 최근 5년 남짓 전도와 성경 보급을 하며 방문한 가정이 2만 곳에 이르렀다. 찾아간 유목민 가정 가운데 65가정이 예수를 영접했다.

2년 과정의 장기 훈련팀도 몽골에서 두 차례 운영했다. 4년에 걸친 훈련을 거치며 자신뿐 아니라 남을 도울 수 있는 사역자들이 일어났다. 그는 사역에 필요한 신앙 서적 번역도 이어 왔다.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책』 같은 책들이 몽골어로 번역되었다.

"북한에 은혜의 빚을 갚아라"

그가 북한을 처음 마음에 품은 것은 2007년 제주 열방대학(University of the Nations)에서였다. 중보기도학교 간사로 섬긴 3개월 동안 그 학교의 기도 대상은 한반도였다. 매일 남북한에 관한 강의를 듣고 기도하던 중 한 문장이 마음에 새겨졌다. "빚을 갚아라."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곧 깨달음이 왔다. 몽골도 한때 공산주의 국가였다. 그런데 몽골은 북한보다 먼저 복음의 은혜를 입었다. 그 은혜는 갚아야 할 빚이었다.

확신은 2010년 9월에 굳어졌다. 베이스 리더가 되기 몇 달 전, 울란바토르의 한 신학교에서 일주일짜리 북한 선교 세미나가 열렸다. 해외에서 여러 선교사들이 강사로 왔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보았다. "하나님은 저에게 직접 가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북한에 갈 사람들을 동원하고, 훈련하고, 보내는 일을 맡기셨어요." 그는 이것을 네트워크 사역이라 부른다. 다르항 베이스가 북한 사역에 꾸준히 참여해 온 까닭이다. 이번 NK Gathering도 그 연장선에 있다.

3년 반의 멈춤, 그리고 '몽골의 안디옥'

2019년 11월 첫째 주, 그는 기도 중에 "움직이지 말라"는 마음을 받았다. 이유도 기한도 몰랐다. 그달 말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시작됐다. 그는 그 뒤 3년 6개월 동안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멈춤의 시간에 받은 과제는 "제자를 삼으라"였다. 그것도 일대일로. 첫 제자는 뜻밖에도 그의 아들이었다. 이어 남자 간사 4명을 골라 함께 운동하고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며 한 사람씩 세웠다. 그 시간이 끝나갈 무렵 새로운 그림이 그려졌다. "몽골 교회를 안디옥 교회로 키우라." 은혜를 누리기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움직이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가 되라는 것이다.

그가 주목한 안디옥 교회의 모습은 두 가지다. 바나바가 바울을 찾아가 데려온 것처럼 협력하는 팀워크, 그리고 큰 문제가 생겼을 때 예루살렘 교회와 함께 풀어 간 동역이다. "그럼 우리의 예루살렘은 어디인가?" 묻던 그는 답을 몽골 선교의 역사에서 찾았다. 몽골에 복음을 전한 선교의 약 80%를 한국 선교사들이 감당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몽골의 예루살렘 교회는 한국 교회다.

훈련 센터가 아닌 선교 베이스

"훈련만 하는 센터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훈련의 목적은 복음을 모르는 곳에 가서 전하고 제자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100% 준비가 되나요? 가면서, 책임을 지면서 배우고 성숙하는 거죠."

그의 말대로 다르항 베이스는 움직이는 센터다. 12년 된 비전교회는 세 지역에 교회를 개척했고, 코로나 이후 2년이 채 안 되는 사이 네 번째 교회가 개척되고 있다. 베이스는 해외에 나가 있는 몽골 선교사들을 매달 적은 금액이라도 후원한다. DTS 기간에는 선교지의 선교사들이 온라인으로 소식을 전하고, 학생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가 내다보는 다음 과제는 청소년이다. 몽골 교회에 청소년이 늘고 있지만 그들을 이끌 사역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 하는 사역에 멈추지 않고 미래의 리더를 키우는 것"이 그의 목표다. 인터뷰를 진행한 필자는 그에게 상담과 코칭의 연결을 제안했다. 상처를 치유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사람이 리더로 자라도록 돕는 코칭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태브나는 이에 공감하며 리더십 코칭에 관심을 가졌다. 일대일 양육을 해 온 그에게는 반가운 도구다.

러시아 군 막사에서 영적 군사의 출정지로

다르항 베이스 건물은 옛날 러시아 군인들이 머물던 곳이다. 태브나는 이곳이 이제 "하나님의 군사들"이 훈련받고 각자 부르심을 받은 곳으로 나아가는 출정지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강의실과 숙소가 부족하다. 이번 NK Gathering에 30여 명만 초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래서다. 시내에서 집회를 열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장소 대여비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베이스에는 생기가 돈다. 지금 DTS를 받는 부부들은 아이들을 베이스의 킹스키즈 유치원에 맡기고 훈련에 집중한다. 가족이 함께 선교의 길을 걷는 모습이다.

기도 제목을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몽골 교회가 안디옥 교회처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움직이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목민으로 살아온 몽골 민족에게 하나님이 주신 DNA가 있지 않을까요." 그는 몽골의 안디옥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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